
감초 역할로 자주 등장하는 배우 우현은 올해 59세로(1964년생)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노안 배우로 유명하죠.
안내상, 한석규, 이선희, 윤다훈과 동갑이며 최수종보다 2살 어리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품에서 주로 가볍고 까불까불한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그는 알고보니 젊은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옥살이까지 한 정의의 사나이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배우 우현의 놀라운 과거와 그의 엄청난 집안 수준까지 알아보겠습니다.
배우 우현이 미국 타임즈 1면에 실린 이유
우현은 연세대학교 출신으로 80년대 있었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집행부로서 당시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물론 49재 행사를 이끌기도 했는데요.
특히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당시 최전방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 사진은 미국 타임즈 1면에 ‘이 주의 사진’으로 실릴 만큼 주목을 받기도 했죠.


이 사진 속에는 당시 우현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참여한 배우 안내상의 모습도 함께 나와 있습니다.
우현은 과거 아들과 함께 출연한 방송에서 MC 손범수가 우준서 군에게 “아빠의 군대 생활에 관해 알고 있냐”고 묻자 우준서 군은 “아빠를 보면 집에서 항상 누워 있을 정도로 게으르고 남자답지 않다. 군대에 안 다녀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우현은 “군대에 정말 가고 싶었다. 대학교 때 학생민주화운동 때문에 감옥에 두차례 갔다 왔다. 본의 아니게 군대에 못 갔다”고 고백했는데요.
삭발을 할 정도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우현은 2차례 투옥된 적이 있는데 이러한 전과로 인해 군 복무를 수행하지 못한 사실이 밝혀지며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현은 1987 항쟁에 최선봉에 섰지만 30년 뒤 영화 1987에서는 완전 정반대인 인물인 치안본부장 강민창 역할로 등장하였는데요,

우현은 배우로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밖에 없었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배우의 꿈을 갖고있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민주 항쟁 이후 그는 신촌에서 ‘지리산’이라는 주점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된 타임지의 사진이 걸려있던 술집은 당시 병맥주가 전국 최저가로 알려져 있을만큼 저렴했고 특히 동문인 연세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찾는 술집이었다고 합니다.
장사가 꽤 잘된 편으로 수입도 좋았으며, 이후 우현은 술집으로 번 돈을 투자하여 지금의 유명 연극 ‘라이어’ 1~3편을 제작, 기획하였다고 하죠.
이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배우의 꿈을 키우며 배우를 전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34살의 늦은 나이에 배우로 데뷔한 그는 키가 작고 외소한 비쥬얼로 주로 노총각이나 가난한 역할을 주로 맡았다고 하는데요,
절친인 배우 안내상조차 처음 그를 만났을 당시 노안의 외모에 우현을 교수님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알고보니 어마어마한 금수저 우현, 한달 용돈이 300만원이었다?
젊었을 적 고생 깨나 했을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 우현은 사실 아버지가 병원장으로 어릴 때부터 굉장히 유복하게 자랐다고 하는데요.
우현은 “어렸을 때 매일 소고기와 쌀밥만 먹었다”며 “아담한 100명 정원이 있는 집에서 온수만 쓰면서 살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학창시절부터 절친했던 배우 안내상에 따르면 “우현은 그때 늘 300만 원 정도를 현찰로 가지고 다녔는데 써도 써도 그 돈을 다 못 쓰더라”며 “한번은 우현의 집에 놀러갔더니 정원이 있고 3층 전원주택이었다. 지하에 집이 따로 있어서 거기가 우현의 집인가? 했는데 전부 우현의 집이었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시청자들은 금수저로 편안하고 안정적이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에 힘쓴 그의 모습에 더욱 감동을 받았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