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예인으로서는 드물게 평소 소탈한 모습을 자주 보이며 때로는 옆집 삼촌, 때로는 옆집 아빠 같은 편안함으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내고 있는 배우 권오중
배우로서 권오중은 시원시원한 외모와 그에 걸맞는 연기력으로 꾸준하게 사랑받고 있는데요.
그러나 호탕한 웃음 뒤에 가려진 정작 인간 권오중에 삶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비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허리 부상으로 인한 의병제대를 겪으며 ‘다시는 연예계에 발을 디뎌 놓지 않겠다.’ 는 결심을 해야 했는데요.
또한 결혼을 반대하는 처갓집 때문에 술을 먹고 혼인신고를 하며 전 세계에 열다섯 명 밖에 없는 희귀병을 가진 아들을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권오중 그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71년 아들만 둘인 집 안에서 아들로 태어난 권오중은 당시 딸을 키우고 싶었던 부모님이 합의 하에 임신했으나 아들 권오중이 태어나는 순간 아버지는 기분이 상해서 바로 술 마시러 나가버리고 어머니는 대성통곡하게 됩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말에는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쏘는 바람에 집안이 그야말로 쫄딱 망해 당시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도 빚쟁이들에게 잡혀 있느라 오지 못했고 이후부터 집 앞 단칸방에서 살며 먹을 것도 없이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후 대학 시절에는 춤에 빠져서 안무가로 활동했던 그는 축제 때마다 초청될 정도로 대학가에서는 상당한 춤꾼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심지어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안무를 그가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성룡을 좋아해, 가수보다는 액션 배우가 되는 꿈을 품고 이후 연기 학원을 다니며 배우를 준비했는데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댄서 배역을 맡으며 드라마에 데뷔한 뒤 그의 mbc 신인 연기상 후보에 오르자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데뷔하자마자 바로 스타가 된 그였지만 그러나 그해 말 군입대와 더불어 허리 부상으로 인한 의병제대를 겪으며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데요.

설상가상 당시 매니저와 관계 악화로 다시는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는 선배와 길거리를 가다가 선배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당시 그는 첫눈에 아 ‘이 여자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작업을 들어가 연락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선배의 친구라 당연히 연상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데 여섯 살이나 연상이라는 것은 꽤나 충격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물불 가리지 않는 한창 때인 23살의 권오중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그녀와 사랑하게 됩니다.
아내의 집안이 무척 엄해서 저녁 일곱시면 반드시 집에 들어가야 했는데 하루는 데이트를 하다가 깜빡하고 밤 열시가 넘어버리자 아내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혹시나 해서 몸 밖에서 기다리니 아내가 울면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아내의 아버지가 두 사람 모두 집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쳤고 그렇게 집에 들어가니 장인어른은 팔짱을 딱 끼고 옆에는 남동생들이 서 있는데 우리 착한 누나가 저 어린 놈 때문에 잘못됐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아내는 큰 형보다 세 살, 작은 형보다는 다섯 살이 많고 심지어 처남들도 모두 권오중보다 나이가 많아서 당시에는 당연히 누나가 새파랗게 어린 놈 때문에 잘못될까 봐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장인어른이 그에게 직업이 뭔가 학교는 졸업했나 어떻게 먹고 살 건가라고 묻자 권오중은 ‘배우는 막 시작했고 학교는 졸업 못했으며 그래도 열심히 먹고 살겠습니다.’ 라며 말도 안 되는 어설픈 대답을 하자 저런 놈을 뭘 믿고 우리 딸을 주냐며 극심한 반대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집안의 반대로 당시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자 그런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던 중 아내 생일날 구청에 데려가 생일 선물이라며 혼인신고를 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장인 장모에게 알려야 하는데 하지만 그러고도 용기가 없어서 당시 술을 잔뜩 마신 뒤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어 저희 혼인신고를 해서 정식 부부가 됐으니 더 이상 반대하지 말아달라며 허락 아닌 허락을 부탁하게 됩니다.
아무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두 사람은 어렵사리 결혼을 했고 또한 이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까지 낳으며 꿈에 그리던 반란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아들이 다섯 살 때 그의 가정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는데 어느 날 아들이 열이 심하게 나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받았는데 갑자기 입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별일 아니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그런데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 병원에 갔더니 장모님과 아내가 오열하며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검사 결과는 그의 아들이 근이영양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렸으며 앞으로 근육이 점점 없어져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요.
한편 그때 그는 코믹 연기를 하는 시트콤을 촬영 중이었는데 그런데 아이가 하늘로 갈 수 있다는 통보를 받으니 촬영장에서도 늘 아이 걱정뿐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당시에는 솔직히 촬영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자신도 아들 따라 하늘로 가고 싶은 심정밖에 없었는데요.
천만 다행으로 아들의 근육병은 오진이라 마침내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나 7살 때부터는 뇌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15명이 앓고 있는 병에 걸려 결국 그의 아들은 남들과 조금 다른 발달장애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렵은 시트콤 이후 배우로서 한창 잘 나갈 때인데 그런데 아픈 아이를 안고 응급실에 가면서 ‘내가 지금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인기가 있으면 뭐 하나? 이 아이와 바꿀 수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배우로서 가장 전성기 때 오히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쏟아지는 수많은 캐스팅을 거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성공보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주어진 시간에 대부분을 가정에서 보내게 되는데 당시 그는 아들의 등교 학교 목욕 등 모든 관리를 하며 또한 또래 친구가 적은 아들을 위해서 가장 친한 친구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이후에도 매일 촬영해야 하는 일일 드라마나 원래 지방에서 몇 개월 동안 있어야 하는 드라마는 주인공으로 섭외가 들어와도 일절하지 않았는데요.
훗날 그에게 ‘대박 드라마였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지 않았냐?’ 라는 질문 오히려 그는 가족을 위한 결정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권오중은 ‘사람은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한 것 같다. 나의 기준으로는 가족이 우선이고 일이나 도는 그 다음이다.’

‘또한 우리처럼 한 번 고통을 겪은 분들이 오히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더 잘 안다. 내가 희귀한 지병 홍보 대사를 오래 해왔는데 치료약도 없이 고통받는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들은 정말 말할 수 없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 가정은 그 아이로 인해서 행복하다.’
‘즉 그런 실현을 통해서 비로소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이 가진 행복에 감사함을 느끼는 거다. 그리고 희귀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뭔지 아는가? 바로 보통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걸 한 번 해보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게 너무 힘들다. 밤샘 근무하는 게 너무 힘들다. 등등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난치병을 가진 분들의 부모는 내 딸이 내 아들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을 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난치병 환자들이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런 경험도 못 해보고 생을 마감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힘들어서 못 살겠다. 이런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며 매사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가끔 우리 아이가 자기는 언제 완치 될 수 있냐고 묻는데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듣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에게 나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희망이 없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배우 권오중에게 밝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수 년간 새로운 방송 포맷에 빠르게 적응하는 센스 있는 예능인의 모습을 보여준 이경규 씨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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